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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 못지않던 독립운동가, 윤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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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선위 작성일17-08-03 08:46 조회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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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최초로 여성의병을 진두지휘한 의병장

 

걸출한 독립운동가임에도 알아주는 이 극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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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이자 두 아들의 엄마이기 이전 조선의 딸로서 조국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의병 가사를 만들고, 노학당을 설립하여 구국운동에 이바지했지만, 정작 우리들에게 생소하기 그지없는 구한말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독립운동 집안의 맏며느리, 여성의병장으로 거듭나다

윤인상과 평해 황씨의 장녀인 윤희순은 1860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태어났다. 윤인상은 인조반정의 공신 윤희평의 후손으로, 대대로 유학자 집안이었다. 1876년 윤희순은 16세에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한 외당 유홍석(고흥 유씨 집안)의 장남 유제원과 결혼했다. 사단법인 애국지사 윤희순기념사업회(회장 유연경)가 강원도 춘천시에 소재한 것도 유제원이 춘천 출신이기 때문이다. 
 

‘안사람 의병가’, ‘병정의 노래’ 등 가사를 창작·보급하여 의병부대의 사기를 북돋아 준 윤희순은 1896년 단발령 시행 이후 전개된 의병운동에 적극 동참한 시아버지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자 의병부대와 더불어 그들의 가족에게 음식과 옷을 조달하고 살뜰히 챙겨 독립운동가 집안의 맏며느리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윤희순의 의병부대를 위하는 마음은 안사람 의병가 중 ‘오병들이 오시거든 뜨듯하고 아늑하게 만져주세 (생략) 우리의병 만세로다’라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여성의 의병활동을 촉구하는 ‘우리나라 오병(의병)들은 나라찾기 힘쓰는데 우리(여성)들은 무얼할까 (생략)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찾기 운동이요. (생략) 우리조선 나라없이 어이살며 힘을모아 도와주세’라는 대목은 윤희순이 시아버지의 영향으로 의병활동에 적극 동참했음을 암시해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로 춘천에서 시아버지를 포함한 의병 600명과 일본군 사이에 혈전이 벌어지자 윤희순은 가정리 여성 30여 명으로 여성의병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하여 의병 취사와 세탁을 도맡았을 뿐만 아니라 직접 의병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윤희순은 남장을 하고 정보 수집했을 정도로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당시, 춘천 의병에 참여한 의병장의 부인, 고흥 유씨 집안의 여성들이 춘천지역 향촌 여성들 76명과 모은 군자금 355냥으로 놋쇠와 구리 등을 구입하여 무기와 탄약을 제조 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중국 망명 이후에도 구국운동 활발히 전개

경술국치일로 나라를 잃자 남편 유제원은 가족에게 독립운동을 위한 중국 망명을 제안했고, 이에 1911년 시아버지를 제외한 모두가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2년 중국의 여러 마을을 돌며 반일 선전과 모금활동을 지속하여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설립한 윤희순은 탁월한 연설 실력으로 ‘노학당의 연설 잘하는 윤 교장으로 불렸도, 노학당에서는 반일 교육을 전개하여 5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구국운동에 이바지했다. 
 

1913년에는 유홍석이, 1915년에는 유제원이 사망했지만, 윤희순의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윤희순은 두 아들 유돈상과 유민상을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시켜 뒷바라지에 전념했고,  1915년 22세에 선대의 뜻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선 유돈상은 음성국, 음성진 등 180여 명의 동지들과 규합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했다. 1928년, 유돈상은 귀국하여 강원도 춘천, 충북 제천 등지를 돌며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에 송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푸순에서 활동했다. 유돈상은 1935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했다. 아들의 죽음에 울분을 참지 못한 윤희순은 같은 해 자서전 ‘해주윤씨 일생록’을 기록하고,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한 뒤 곡기를 끊어 숨을 거두었는데, 그의 나이 76세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의병집안의 맏며느리로 의병부대를 돌봤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병활동과 노학당 운영으로 구국운동에 이바지한 윤희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윤희순의 유해는 1994년 이전까지 랴오닝성 하이청현 묘관둔 북산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이후 고국으로 봉환됐고, 유제원과 춘천시 남면 관천리 선영에 합장했다. 이후 윤희순의 업적을 기리고자 강원도 춘천시 남면 발산리 생가 터에는 ‘해주윤씨의적비’, 묘소에는 ‘애국선열윤희순여사사적비’ 등을 세웠고, 춘천시립도서관에도 윤희순 동상을 건립했다. 
 

오랫동안 윤희순을 연구한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은 “당시 팽배했던 전통 유교사회 분위기와 일제강점기 암울한 현실, 여성의 사회적 입지 등을 고려했을 때, 윤희순의 행보에는 의병정신에 담긴 한국인의 끈기, 자주적인 한국 여성의 삶, 나라를 되찾겠다는 민(民)의 마음 등이 종합적으로 담겨있습니다. 즉, 윤희순은 시대의 틀을 깨고 일어선 강직한 한국 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피력했다. 유연경 사단법인 애국지사 윤희순기념사업회장은 “유관순처럼 윤희순 선생의 업적도 후손들에게 기리 기억되길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 알려진 이회영 일가처럼 윤희순의 집안도 독립운동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나 현재 윤희순 일가에 대해 기억하는 후손은 많지 않다. 이제부터라도 윤희순이라는 독립운동가를 알려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하지 않을까?

정리 / 이슈메이커 김도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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