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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유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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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선위 작성일17-08-02 14:21 조회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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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행합일의 의병장

 

화서학파 최후의 학자이자 실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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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제정됐다. 곽재우가 전근대사의 대표적 의병이라면, 의암 유인석은 근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의병장으로 꼽을 수 있다. 을미의병투쟁을 주도하고 해외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그의 삶을 되돌아본다.

화서학파의 계승자

한국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인물은 최익현이다. 최익현이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돼 대마도로 유배를 간 이후 위정척사파의 활동은 근현대사에서 주목받지 못한다. 하지만, 최익현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는 근현대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 1842~1915년)이다. 유인석은 최익현보다 일찍 역사에 등장하는 위정척사파 인물인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년)의 학풍을 이었다.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존화양이(尊華攘夷) 사상에 심취한 유인석은 186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병인양요 때 스승 이항로를 쫓아 서울에 머물면서 위기에 처한 조선을 직시하고 위정척사 사상을 한층 더 굳게 쌓았다. 1868년 이항로가 사망한 후, 유인석은 화서학파의 중심에 섰다. 고종이 흥선대원군을 물리고 친정을 하면서 쇄국정책을 풀고 일본과 조약 체결을 논의하자, 유인석을 대표로 한 화서학파의 47명은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북학파를 계승한 개화파의 주장에 따라 더 이상 개항을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고종은 조일수호조류를 체결했다.

위정척사파의 주장에 따라 쇄국을 유지하는 정책이 조선의 미래에 더 유리한 방안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개항을 하면 외국의 문물이 조선에 들어와 토산품을 밀어내고 경제를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위정척사파의 지적은 사실로 드러났다. 일본의 지주들은 조선의 농촌까지 들어와 경제적 빈곤함에 처한 농민들의 벼가 익기도 전에 매입하려 했고, 농민들은 당장 배고픔을 하고자 헐값에 벼를 매각했다. 경제적 속박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여러 국내 사건을 기회로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했고 마침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에 개혁을 요구했다. 이 개혁은 일본이 조선으로 진출하는 데 용이한 환경을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1894~1985년 사이에 일본의 압박으로 조선의 고관들이 추진한 개혁은 위정척사파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반발을 샀다. 전통적인 의복제도를 서양식 복식으로, 음력을 양력으로 고쳤고, 일본 낭인들이 일본과 각축을 벌인 러시아와 친밀했던 왕후 민 씨를 궁에서 살해했다. 단발령 강제 시행을 도화선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고난의 망명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 세력이 중앙의 친위대가 지방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내려간 틈을 타서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친일파 혹은 일본과 비교적 가까운 고관들은 살해되거나 국외로 망명했고, 개혁은 철폐되고 제도는 예전으로 회귀했다. 친일파를 축출한 조정은 의병을 해산시키고자 했지만, 유인석은 개화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이상 의병항쟁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제천전투에서 결정적인 피해를 입은 유인석과 그의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은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보다 장기적으로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한인들이 모여 살고 있던 통화현 오도구로 이동했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중국 동북부가 혼란에 빠지자 일시 귀국했던 유인석은 고종이 헤이그 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연해주로 망명했다.
 

사실 당시 항일운동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군주제 조선을 회복하려는 보황주의, 하나는 공화정을 추구하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두 세력은 좀처럼 힘을 한 데 모으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활동했다. 유인석은 조선에서 가장 보수적인 성리학자였으나, 연해주에서 공화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힘을 모았다. 그 결과 1910년, 조직된 항일운동단체가 십삼도의군이다. 유인석은 도총재로 추대됐고,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신민회의 주도자인 안창호는 도총소의원으로 참가했다.
 

중국 동북부와 연해주에서 한인이 항일투쟁을 준비하자, 일본이 국내외 사정이 어려운 러시아를 압박해 항일운동가를 체포하도록 했다. 모처럼 두 개의 서로 다른 노선이 일치합심한 십삼도의군은 해체됐다. 러시아의 탄압을 피해 서간도로 망명한 유인석은 1915년, 7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며 유인성의 공로를 인정했다. 진보와 보수보다 군주제와 공화제의 간극은 더 크다. 국가체제가 상호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가장 보수적인 화서학파의 수장인 유인석이 공화파와 협력하는 것은 당대 인물로서 매우 힘든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국가의 독립을 위해 노선이 다른 세력과 연합을 이룬 유인석은 오늘날 진보와 보수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한국 정치에 의미가 있는 인물로 기억돼야 할 것이다.

 

정리 / 이슈메이커 박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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