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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중봉 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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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선위 작성일17-08-02 14:16 조회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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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유학자이자 의병장

 

철저한 개혁 정론으로 실학에 큰 영향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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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군에서는 매년 봄에 중봉 조헌을 기리는 춘향제를 지낸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유학자였던 중봉 조헌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수복하는 등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금산전투에서 700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했다. 그래서인지 조헌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으로, 서인의 핵심 정치가인 점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유학자이자 개혁론자인 조헌에 대해 알아보자

유학중심의 개혁을 말하다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이 가난했지만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했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속하였다. 이후 정주(定州)교수로 3년간 있으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1572년(선조 5년)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이 옳지 않음을 말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과 제도의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후에 박사(博士), 호·예 2조 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경기도 통진 현감을 지냈다. 현감 재임 중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궁노비를 취조 중 장살해 부평에 귀양 갔다. 1581년에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사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이 민폐가 되므로 개혁할 것을 청하고 이율곡 등의 선비들과 친분을 유지했다. 1582년에는 보은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으나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 1586년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公州) 제독이 되어 선비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리는 한편 정여립의 행패를 따지고 공격하였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해 여러 번 물리치므로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갔다.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철저히 논했다가 길주(吉州)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이렇듯 조헌은 철저한 유교적 입장에서 많은 개혁안을 상소하고 정론(正論)을 폈다.
 

조헌은 상소로 많은 개혁안을 냈다. 특히, 1574년 성절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후 명나라의 문물제도 중 본받을 만한 내용을 정리한 질정관회환후선상팔조소(質正官回還後上八先條疏)를 올렸다. 조헌이 올린 상소문의 주요 내용은 중국을 따라 국가의 문묘(文廟) 제도를 개선할 것, 중앙과 지방의 관리 임용 제도를 개선할 것, 사치 풍조를 금하여 계층이 모두 평등하게 입게 할 것, 중국의 물자 절약을 본받을 것, 관리들의 번잡한 예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예로 개선할 것, 스승과 생도가 서로 대하는 예절과 삭망(朔望)에 알성하는 규례를 중국 제도대로 할 것, 중국처럼 마을마다 향약소를 두어 백성을 교화시킬 것, 군령을 엄하게 하여 군사가 백성의 물건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중국의 장수 기르는 제도를 본받아 문무를 겸비한 장수를 길러낼 것 등 8개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이 같은 조헌의 개혁론은 후에 실학파로 지칭되는 유형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박제가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서 박제가가 그의 저서 북학의에서 조헌을 존숭하고 계승하려 했다.

금산전투와 700의총

과단하고 직선적인 기질과 정치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성향 등 조헌은 관료로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직선적인 성향은 적극 발휘 되었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했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의 시기로 홍성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왜군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였는데, 승장(僧將)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그때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영규와 함께 금산을 향해 가서 왜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약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게 된다. 사후 조헌은 1604년(선조 37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609년(광해군 1년)에 그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액이 하사되었으며, 1754년(영조 30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문묘에 종사되었다. 또한, 조헌은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으로 평가 된다.

정리 / 이슈메이커 박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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