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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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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선위 작성일17-08-02 14:11 조회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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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된 평가를 받는 초대 대통령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대통령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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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의회의 탄핵소추안을 인용하여 박근혜 대통령을 면직했다. 언론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라고 전했다. 한편, 한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헌법적 관점에서 볼 때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4월 13일 임시정부수립기념일, 4월 19일 4.19혁명기념일을 맞이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치적 생애를 다뤄본다.

 

자유주의자였던 이승만 전 대통령

이승만은 몰락한 양반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그는 입신양명을 위해 13세부터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11차례 고배를 마셨다. 당시 과거합격자는 사실상 내정되었던 터라 이승만은 낙방할 수밖에 없었다. 1894년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여러 구제도가 혁파되었는데, 그 중에 과거제도 있었다. 11차례나 실패를 맛본 이승만은 과거제가 폐지되자 좌절감을 느꼈고 그것이 조선의 체제에 대한 거부감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도 있다.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이승만은 20살이 되던 해,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해 신교육을 접했다. 본래 불교신자였던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재학하면서 개신교를 접하게 됐고 개화사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미국의 정치시스템, 문화를 겪고 미국을 동경하게 됐다. 청년 이승만은 조선의 모순된 제도에서 입신양명의 꿈을 접었고 신식학문을 배우면서 서구열강의 제도를 동경하게 되면서 조선의 전제군주제를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승만이 배제학당에서 수학하고 있던 때 갑신정변에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미국에서 유학하고 조선에 돌아올 수 있게 된 서재필을 만나게 됐다. 서재필은 망명 이후 서구문화에 완벽히 적응했고 미국시민권까지 취득한 필립 제이슨(Philip Jason)이 됐다. 이러한 서재필과 가까운 이승만은 더욱 서구문명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친미적 성향을 가지고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신학문을 배우며 성장한 지식인 이승만은 매일신문 기자를 거쳐 제국신문과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며 언론인으로서 이력을 쌓았고, 독립협회에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만민공동회에서 연사로 연설을 하며 명성을 쌓았다. 비록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의 전제군주제를 뒤엎고 공화정부를 추진한다는 소문에 휘말려 무력으로 해산되고 계몽운동가 이승만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그의 명성은 높아져갔다.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전환하고자 노력한 독립협회의 이승만은 당시 모순된 체제의 대한제국을 개혁하고 시민의 주인의식을 강조한 자유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보수진영은 이승만이 젊은 시절 계몽운동에 나선 것을 부각해 높게 평가하는 반면, 진보진영은 이승만 개인에 대한 평가보다 독립협회의 개혁성과 미일의존성을 동시에 다루는 편이다.

‘최초로 탄핵과 하야’를 겪은 대통령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18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인용해 면직 처리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처음 탄핵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헌법 전문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국사상 처음으로 탄핵된 대통령이 아닐 수 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 탄핵을 받아 면직된 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승만 전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애국지사들은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의 강압적인 통치에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기관을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가 국내에 한성정부, 상해에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애국지사들은 세 기관을 통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한성정부를 계승하되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치기 위해 소재지를 상해 내 프랑스 조계지에 두었다.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였던 이승만은 임시헌법에 따라 임시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을 위해 세계정보를 수집하고 외교전을 벌이기 위해 유럽 국가들의 공사관과 가까운 상해를 선택했다. 반면, 만주와 연해주에 거주하는 무장독립투쟁론자들은 외교전에 치중하는 임시정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군사적 실력을 배양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7년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지도에 들어서면서 임시정부 내 사상적 분열이 일어났고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에 크게 패한 일본군이 자행한 간도참변이 발생하면서 임시정부의 지도력은 도마 위에 올랐다.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유일한 임시정부를 자처하면서도 만주에 있는 동포들을 지키기 못했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곧 이어 이승만 임시대통령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이 박용만과 신채호에 의해 폭로됐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를 혁파하고 새로 건설하자는 ‘창조론’과, 유지하되 개혁하자는 ‘개조론’이 떠올랐고, 이러한 움직임에 김구와 같은 ‘고수파’는 정부파괴운동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파국을 겪으며 임시정부의 지도력은 무너졌고 이승만 임시대통령은 미국에 체류하며 상해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임시정부의 국회인 임시의정원의 의원들은 1923년 이승만 임시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했고 2년 후 이승만 임시대통령은 면직됐다. 임시정부의 수립부터 대한민국이 국가로서 출발했다는 주장에 따른다면, 이승만은 한국 역사 이래 최초로 탄핵을 받아 면직된 대통령이다.

러나 이승만은 35년 만에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후 구성된 제헌의회에 의해 다시 대하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반공주의를 천명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재집권을 시도하기 위해 한국전쟁 중에 정치깡패집단을 동원한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고, 자신의 3선 집권을 위해 사사오입이라는 세계 헌정정치사상 유일무이한 해석을 주장하며 헌법을 개헌했다. 그리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신의 양자인 이기붕에게 안정적으로 정치권력을 넘겨주기 위해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규모 부정행위를 자행했다. 이에 마산을 기점으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촉발했고 경찰의 발포에 시민들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해 시위는 4.19 혁명으로 전환되었다. 결국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전제군주제의 조선, 대한제국 안에서 계몽, 자유를 외쳤던 지식인 이승만은 공화정의 대한민국 안에서 부정과 독재를 저지르다 시민의 행동으로 물러나게 됐다. 보수진영이 이승만을 자유주의자로, 진보진영이 독재자로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이유다.

정리 / 이슈메이커 박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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