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실역행(務實力行)의 지도자, 안창호 > 역사 인물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ѱι ȸ -  ȸ ⿩ϴ ι ˸ ο  з ݿ  ִ  մϴ

역사 인물

HOME > 한국의인물 > 역사 인물
역사 인물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지도자, 안창호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선위 작성일17-06-22 13:29 조회20회 댓글0건

본문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지도자, 안창호, 민족의 독립과 통합을 위해 바친 인생

 

“서로 사랑하면 살고, 서로 싸우면 죽는다”

 

 

08e7015d2aa31a674591298e9b1fbefa_1498105241_9855.jpg


대한민국은 독립한 후에 동서냉전의 한복판에 놓였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내 정파 간의 이념대립은 극단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약 69년이 되는 2017년, 이념대립의 해소는 요원해 보인다. 극심한 좌우대립의 시대를 극복하고 국민을 통합해야 할 시점에서 도산 안창호가 남긴 민족통합의 행보는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제시한 혁명가 

2017년 5월 9일,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국민의 손에 의해 선출된다. 국민통합은 이번 대통령 선거 과정의 핵심어가 될 것이다.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을 도화선으로 18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면서 광장은 크게 두 축으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탄핵을 찬성하는 국민이 반대 측보다 많지만, 갈라진 두 민심은 통합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통합을 이끌 새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에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년)의 정신은 다시 회고하기에 충분하다.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 섬에서 태어난 안창호는 청소년기 청일전쟁의 격전지가 되어 파괴된 고향을 목도했다. 그는 아무런 혐의가 없는 조선에 청과 일본이 제멋대로 들어와 전쟁을 벌인 것은 우리에게 힘이 부족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를 계기로 안창호는 19세 때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관서지부의 만민공동회에서 첫 연설을 하면서 일약 웅변가로 명성을 얻었다.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려 한다고 반동세력이 날조한 ‘익명서 사건’으로 해체된 후, 안창호는 190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미국에 있는 한인들의 열악한 처지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는 공부를 포기하고 동포들을 지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초기 미국 교민사회에서 대중적인 지도자로 성장한 안창호의 명망은 더욱 드높아졌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2차 한일협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에 넘어가는 순서를 밟자, 안창호는 1907년 귀국해 양기탁, 이동휘 등 국내 애국계몽운동가들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했고 부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신민회는 신민(新民)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새로운 인민 즉, 공화국의 인민으로 구성된 자유민주 독립국의 건립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목표로 하는 이전의 주장에서 진일보한 구상이었다. 비록 안창호가 중심이 된 신민회가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을 겪으며 강제로 해산됐으나, 공화국의 건립을 목표로 하는 정신은 독립운동의 주요 이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앞서 신민회가 설립된 직후, 안창호는 미국에서 귀국해 1907년 5월 12일 청년, 학생들 앞에서 그의 명연설 중 하나인 ‘삼선평여설(三仙坪演說)’을 했다. 연설의 핵심은 우리의 국권을 침해하는 일본과 언젠가는 치워야 할 전쟁을 준비하고 기필코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안창호의 독립전쟁 준비론이다. 그리고 독립을 쟁취하고 건전한 민주사회를 건설할 학생과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해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했다.

 

민족의 통합을 위해 노력한 애국자 

1919년 일본의 식민통치에 저항해 독립을 외친 3.1운동을 전후로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조직됐고, 서울에서도 한성정부의 구성이 발표됐다. 이시기 항일독립운동 전선의 통합은 시급한 과제였다. 안창호는 3개월에 걸쳐 헌신적으로 노력해 정통성은 한성정부가 가지고,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치는 독립을 위해 외교활동이 용이한 상해로 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권위를 갖추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족독립을 위한 안창호의 민족통합 행보는 계속됐다. 1920년대 중반은 좌우합작의 시기였다. 1924년 중국에서는 북방 군벌과 그 배후의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국민당, 공산당 간의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한때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돼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이광수는 변절해 1924년부터 동아일보 간부진, 천도교 신파와 함께 일본의 문화통치에 기대를 걸며 자치운동을 전개해 민족주의 세력을 분열시켰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제와 타협하지 말고 이념을 초월해 민족 혁명의 유일한 전선을 만들자는 기운은 세졌다. 이에 안창호는 1926년 좌우합작의 민족독립당운동에 앞장서며 주의(主義) 여하를 막론하고 단합된 통일노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이징에서 좌파세력의 대표 원세훈을 만나 이당치국(以黨治國) 형태의 민족협동전선으로써 대독립당을 결성하는 방법에 합의를 보고 그해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창립했다. 안창호는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순수 자본주의 체제와 전체주의적 공산주의 체제의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적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의미의 대공주의를 주창했다. 2년 뒤, 코민테른이 민족부르주아지의 개량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투쟁을 선언하는 ‘12월 테제’를 발표하자 국외 민족유일당운동은 붕괴했으나, 안창호의 통합 행보는 국내 민족협동전선이자 최대 규모의 항일단체인 신간회의 창립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1938년 사망한 안창호는 독립을 위해 민족을 통합하고 민주국가를 설립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진보와 보수, 여와 야로 갈려 서로 국민의 적으로 규명하는 분열의 정치가 계속된 오늘의 정치 현실에서 안창호의 민족통합정신은 다시 돌이켜볼 만하다.

정리 / 이슈메이커 박지훈 기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한선위소개 개인정보처리방침 이용약관
한국의인물 선정위원회
서울시 영등포구 국제금융로2길 37 (여의도동 S-TRENUE) 3004호 | tel : 070-4352-3239 | fax : 070-8787-8978
상호명 : 사단법인 한국의인물선정위원회| 고유번호 : 178-82-00139 |대표자명 : 이종철
Copyright ⓒ 사단법인 한국의인물선정위원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