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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비서이자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 부대장, 이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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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선위 작성일17-08-03 09:00 조회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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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 조선 독립운동에 한평생 마치다

 

역사 뒤안길로 사라진 그의 업적 복원하는 작업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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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서 한일애국단의 백범 김구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구를 보필한 그의 비서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김두봉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담한 이화림은 조선의 번영을 위해 한평생 희생했지만, 이념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역사에서 지워졌다. 광복절이 있는 8월 이화림 선생에 대해 조명했다.

독립운동 정신 높이 산 김구 선생의 비서

1905년 1월, 이화림(본병 이춘실)은 아버지 이지봉과 어머니 김인봉 사이에 태어난 4남매 중 막내였고, 평양시 경찰리가 고향이다. 비록, 그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어머니와 오빠의 도움으로 숭현소학교에 다니며 유치원 선생님의 꿈을 키워갔다. 실제 이화림은 졸업 후 군산시와 청진시에 소재한 유아원에서 근무한 적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인 오빠 이춘성, 이춘식의 영향을 받은 이화림은 평양 3·1운동 가담을 시작으로 역사문화연구회원, 1927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극심한 일제 탄압으로 193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김두봉을 만난 이화림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인생이 시작했다. 김구는 독립운동에 열정적인 이화림을 자신의 비서로 뒀고, 그 덕에 그는 김구·이봉창·윤봉길이 계획한 거사에 조력자로 활동했다. 이때, 이화림은 이동해(李東海)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폭탄투척사건 이후 일본의 감시가 삼엄해져 독립운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그는 광저우 중산대학교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고, 중산대학 유학생 김창국을 만나 결혼해 아들 김우성을 낳았다. 그러나 그의 결혼생활을 얼마 가지 못했다.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 부대장으로 항일운동 가담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청년당원 모집을 위한 윤세주의 연설에 감동받은 이화림은 혁명을 위해 가족과 헤어져 이듬해 1월 난징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해 부녀국 의료보건사업 책임자로 임명됐다. 난징대학살 이후 일본이 대륙 깊숙이 침략해오자 그는 조선민족혁명당원들과 함께 1938년 총칭으로 옮겼고, 1939년에는 구이린으로 이동해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의 부대장으로 활동했다. 1941년에 다시 화베이 타이항산지구 팔로군 항일근거지로 이동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화림은 1942년 3월경 화베이조선인민간부훈련반에 입학해 중국혁명사와 중국공산당사를 배우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졸업 후 이화림은 1943년 봄부터는 조선의용군 병원에서 근무했고, 1944년 4월 예안으로 들어가 화베이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두봉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이후 이화림은 1945년 1월 중국의과대학에 입학해 그해 8월 옌안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학업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고, 졸업 후에는 옌볜의학원에 배치됐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화림은 중국인민해방군의 지시로 조선인민군 제6군단 위생소 소장으로 파견돼 복무했지만, 도중에 미군의 폭격으로 부상을 입어 랴오닝성으로 가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여성, 공산주의자이기에 외면당한 그의 업적 재평가가 필요합니다”

중국에서 선양의사학교 부교장, 중공고급당교 수학, 중국 교통부 의생기술과 간부, 옌볜조선족자치주 위생국 부국장과 주의 당대표를 맡아 활동한 이화림은 문화대혁명 때 반혁명분자로 찍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 후 그의 명예는 회복됐지만, 건강이 악화돼 노년에는 다롄에서 요양하며 조선 민족을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999년 2월 9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오랫동안 이화림에 대해 연구한 박경철 박사는 “공산주의자였던 이화림 여사는 훗날 이념갈등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우리의 역사에서 지워졌습니다. 또 김구 선생이 이화림 여사의 열정을 높이 사 비서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백범일지에는 이화림 여사에 대한 언급이 없고, 김구 선생을 연구하는 학자와 관련 단체에서도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라고 전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유명한 사건 중 하나인 상하이 홍커우공원 폭탄투척사건에 적극 협조했던 이화림 선생. 그가 조선 독립을 위해 일평생 항일투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이념이 다르단 이유로 그의 업적을 외면했다. 이제부터라도 ‘빨갱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 이화림 선생의 업적을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정리 / 이슈메이커 김도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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